구방소설

2026. 8. 24.

제1화: 급처합니다

제1화: 급처합니다

한서인은 이사 온 지 열흘 만에 부엌 서랍 정리를 포기하고 중고거래 앱을 열었다. 신축 오피스텔이라 가전이 죄다 새것이어야 마땅했지만 통장 잔고는 그 마땅함을 따라주지 않았다. 마침 같은 단지 매물 중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상태 최상, 가격은 반값도 안 됐다.

판매자 닉네임은 '영주'였고 프로필 사진 없이 짧은 문장만 있었다. 서인이 채팅을 보내자 답장이 이상할 만큼 빨리 왔다. "오늘 바로 가져가실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이요." 서인은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가격을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약속 장소는 같은 라인 502호였다. 문을 연 여자는 마르고 눈 밑이 검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상자를 손짓하며 여자가 말했다. "이거 하나면 돼요. 빨리요. 오늘 안에 가져가 주셔야 해요." 서인이 이유를 묻자 여자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박스에는 쿠쿠 에코웨일 건조분쇄 음식물처리기, CFD-ENL201DCGW, 그레이스 화이트라는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상자는 뜯은 흔적이 있는데도 사용감이 거의 없어 보였다. 서인은 그 부조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택배 기사를 불러 그날 저녁 바로 집으로 옮겼다.

설치는 어렵지 않았다. 개수대 아래 배수구와 연결하고 전원을 넣자 기계는 조용히 웅웅거리며 돌아갔다. 그런데 이틀째 되던 밤, 서인은 잠결에 그 기계가 혼자 작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타이머를 맞춘 적이 없는데도 분쇄 모터가 저 혼자 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서인은 결국 뚜껑을 열어 내부 분쇄통을 확인했다. 음식물 찌꺼기 사이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손을 넣어 건져낸 것은 작은 금속 반지였다. 안쪽에 이니셜 두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서인은 처음엔 전 주인이 실수로 흘린 물건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반지를 씻어보니 표면에 탄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마치 뜨거운 것에 오래 닿았던 것처럼.

같은 날 오후, 서인은 엘리베이터에서 관리소 직원 최기석을 만났다. 그는 서인이 502호 물건을 샀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거기 남편분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아세요? 벌써 삼 주짜리요." 서인의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반지를 움켜쥐었다.

서인은 그날 저녁 다시 5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영주는 문을 살짝만 열고 서인을 노려봤다. "그 기계, 왜 다시 가져오셨어요?" 서인이 반지를 꺼내 보이자 영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이거 어디서 나왔는지 아세요?" 서인이 묻자 영주는 문을 닫으려 했다. 서인은 문틈에 발을 끼우고 다시 물었다. "이니셜이 뭐예요. J.K. 남편분 이름이 뭐예요?" 영주는 대답 없이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날 밤 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음식물처리기를 뜯어보기로 했다. 분쇄날 아래 틈새, 평소라면 손이 닿지 않는 자리에 두 번째 물건이 끼어 있었다. 손톱만 한 넥타이핀이었는데, 거기에도 같은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넥타이핀을 인터넷에 검색하자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 판매 페이지가 나왔다. 구매자 후기 중 하나에 '남편 생일 선물로 좋았다'는 댓글이 달려 있었고, 그 아이디의 프로필 사진 배경이 서인이 이사 온 오피스텔 로비와 똑같았다.

다음 날 서인은 최기석을 다시 붙잡고 502호 남편의 이름을 물었다. "김재혁이요, 왜요?" 서인은 넥타이핀에 새겨진 J.K.가 김재혁의 이니셜과 일치한다는 걸 확인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인은 결심하고 관할 파출소에 반지와 넥타이핀을 가져갔다. 담당 경찰은 시큰둥하게 듣다가 이니셜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바뀌었다. "이거, 실종 신고 접수된 사람 물건일 수도 있겠는데요."

경찰이 502호를 방문했을 때 문영주는 이미 집에 없었다. 대신 거실 바닥에 새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똑같은 모델, 똑같은 색상의 쿠쿠 음식물처리기였는데 이번엔 상자 겉면에 핏자국으로 보이는 얼룩이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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